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취미생활/낙서일기

좋은 시를 읽었다. 이재무의 <갈퀴> 2009.11.27

by 피타칩스 2015. 12. 30.



갈퀴

이재무

 

흙도 가려울 때가 있다

씨앗이 썩어 싹이 되어 솟고

여린 뿌리 칭얼대며 품속 파고들 때

흙은 못 견디게 가려워 실실 웃으며

떡고물 같은 먼지 피워 올리는 것이다

눈 밝은 농부라면 그걸 금세 알아차리고

헛청에서 낮잠이나 퍼질러 자는 갈퀴 깨워

흙의 등이고 겨드랑이고 아랫도리고 장딴지고

슬슬 제 살처럼 긁어주고 있을 것이다

또 그걸 알고 으쓱으쓱 우쭐우쭐 맨머리 새싹은

갓 입학한 어린애들처럼 재잘대며 자랄 것이다

가려울 때를 알아 긁어 주는 마음처럼

애틋한 사랑 어디 있을까

갈퀴를 만나 진저리 치는 저 살들의 환희

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

사는 동안 가려워 갈퀴를 부른다 

 

오래간만에 중도에 들렸다. 서고에 들어서면 왠지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탁 트인 쇼파에 앉아 문학사상을 펴들었다. 거기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했다. 이재무의 갈퀴. 가렵다, 가렵다, 가렵다. 이 말이 왜 이렇게 내 마음을 파고드는지, 나도 누군가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, 내 가려운 곳을 누군가가 긁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올랐다. 

 

이 시의 신선한 촉각적 심상이 근 일년 간 메말라 있던 나의 감성에 햇빛을 비췄기 때문이었을까, 어젯밤 무리해서 밤을 샜기 때문이었을까, 그 탁 트인 도서관 로비 북 카페에서 난 쪽팔림도 모르고 책을 꼭 안은 채 잠들고 말았다. 도서관의 밝은 조명도, 불편한 쇼파도, 신문 보는 옆사람들도 신경쓰지 않은 채. 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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